「수라도」문학기행
황산베랑길 이야기여행
명작의 무대 화제리 <2> 「수라도」 문학기행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는 요산 김정한의 중편소설 <수라도(修羅道)>의 무대로 잘 알려져 있다. 화제리는 요산의 처가가
있엇던 곳이고, 주인공 가야부인은 처조모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작품 속 손녀로 나오는 ‘분이’는 요산의
부인으로 상정해 볼 수 있다. ‘가야부인’이라는 호칭은 가야국 옛터인 김해가 그의 고향이라 그렇게 이름한 것 같다. 소설에는
가야부인이 ‘명호’라는 곳에서 시집왔다고 돼 있다. 명호는 지금의 부산시 강서구 명지동을 지칭한다. 한때는 명지 소금이
생산되었으며, 옛날에는 낙동강 수로를 따라 소금배가 오르내리곤 했다. 작품의 제목인 <수라도>는 불교의
‘아수라도(阿修羅道)’의 준말로 ‘싸움을 일삼는 악마들’이 사는 곳을 말한다. 이는 곧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의 혼란과 어둠의
시대를 그리는 소설의 작품 세계를 의미한다. 생전에 교만심과 시기심이 많은 사람이 죽어서 간다는 <수라도>는 주인공인
가야부인이 살아온 고통스러운 현실을 대변한다. 가야부인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수라도’를 헤치는 고통의 행로와도 같았다.
<수라도>에 그려진 화제리의 풍경은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수라도>룰 읽은 사람이라면 처음 화제리를
찾더라도 별로 낯설지 않다. 작품을 읽다 보면, 오봉산과 토곡산에 둘러싸인 ‘화제리 열두 개 마을’ 의 정경과 등장인물들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작품과 실제가 상당 부분 겹치기는 하지만,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감을 반영했다
하더라도 작품은 어디까지나 작품이기 때문이다.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인 하동 평사리의 ‘최참판댁’도 대부분 허구의
산물이라지 않던가. 거기에 비하면 <수라도>의 현장은 상당히 리얼하다. 따라서 문학기행을 하기엔 최적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물금고개를 넘어 화제리 초입에 들어서면 가야부인의 시아버지가 살았다는 명언마을이 나온다. 마을 어귀 느티나무가 인상적이다. 소설
속의 길들을 좇아 무당 천금새가 산다는 태고나루(토교)도 가보고, 냉거랑(화제천) 건너 오봉선생의 유일한 글 친구인 양접장이
사는 대밭각단(죽전)에도 가보자. 대밭각단 들머리에는 수백 그루의 잘 자란 솔밭이 있다. 소나무 사이로 듬성듬성 작은 무덤들이
들앉았는데, <수라도>에서 괴질에 비명으로 죽은 고명딸의 시신이 있던 곳이다. 이곳은 어린이들이 방문할 경우,
‘아수라도’의 귀신 판타지 체험장소로 활용해도 될 것이다. 황산베랑길을 따라가다 만나는 용화사의 미륵당도 놓쳐서도 안될 곳이다.
이제 소설 속으로 들어가보자. 소설 속 지명은 십중팔구 현재의 지명과 겹친다.
생생한 문학현장
①명언마을 (소설 속 허진사댁)
시아버지 오봉선생(오봉산 밑으로 오고부터 부른 호라 한다)은 점잖게
닦인 말씨에 약간 울적한 표정을 짓다 말았다. 역시 고풍따라 시집은 사흘째 되는 아침부터 가야댁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오봉선생은 가야부인의 시아버지다. 시아버지인 허진사는 별호가 오봉선생인데, 이는 시아버지가 북정에서 오봉산 밑으로 이사
오고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까다로운 유교 가문으로 시할아버지는 진사급제를 하고도 벼슬을 하지 않았을 만큼 절개 있는 선비
집안이다.
허진사 댁은 화제 오봉산 밑 어딘가로 그려지고 있는데, 정황상 지금의 명언마을일 것으로 보인다.
마을 어귀에 서 있는 해묵은 느티나무가 마을의 연륜을 말해준다. 가야부인도 허진사 댁 아니면 그 부근에 살았을 것이다. 마을
입구에 ‘범죄 없는 마을’이란 안내 글귀가 눈에 띈다. 꼿꼿한 선비로 그려진 오봉선생의 이미지가 오버랩 된다.
② 화제교 (소설 속 냉거랑다리)
너무 앞을 서두르느라고 미처 얘길 못했지만, 오봉선생에게는 먼데서 찾아오는 유생들 이외에, 인근동에는 글이나 나이로 보아서 벗될 만한 사람이 바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양접장만 하더라도 그랬다. 그는 ‘냉거랑’이라고 불리는 시내 저쪽 대밭각단이라는 마을의 글방 접장이로서, 그곳 주산인 오봉산 발치의 질펀한 들녘을 에워싼 열두 부락에서 오봉선생의 유일한 글친구요, 또 바둑친구였다. 오봉선생은 속이 울적할 때는 곧잘 그를 찾아갔다.
소설에는 ‘냉거랑다리’가 자주 등장한다. 마을의 이곳저곳을 분주히 다녀야 하는 등장인물들이 건널 수밖에 없는 다리이기 때문이다. 가야부인의 사위인 박서방의 집은 냉거랑 건너 대밭각단에 있는 것으로 설정돼 있다. ‘냉거랑’이라는 단어는 ‘차다’는 뜻의 ‘냉(冷)’과 개울을 뜻하는 ‘거랑’이 합쳐진 말이다. 그러니까 냉거랑은 ‘차강누 물이 흐르는 시내’로 풀이된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윗 계곡에서 새들교를 거쳐 화제교회 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항상 물이 많고 맑았다고 한다.
③ 죽전마을 (소설 속 대밭각단)
가족들은 쥐 죽은 듯이 말이 없었다.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고는 비로소 모두 냉거랑 건너 대밭각단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대밭각단이란 부락 아래쪽 솔밭 속에 희미한 불빛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대밭각단 아래쪽 솔밭 속에는 가야부인의 죽은 고명딸의 체봉(체봉)이 있었다. 마마에 죽은 어린것들의 시체를 오쟁이에 넣어서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달아 두듯이, 그녀의 딸도 괴질에 죽었다 해서 괜스레 악령의 소멸을 빈다는 버릇으로, 그렇게 솔밭 속에 빈소를 얽어놓고 이른바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악질에 비명으로 죽은 것도 원통한데, 시체마저 흙 속에 곧 묻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욱 원통하여, 가야부인은 생각만 나면 밤중이라도 그 먼 데까지 우루루 달려가서 흐느끼는 것이었다.
대밭각단(일명 대바각단)은 바로 죽전마을을 일컫는다. ‘각단’은 ‘뜸’이라고도 하는데, 한 동네 안에서 몇 집씩 따로 모여 있는 구역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죽전마을에는 지금도 병풍을 두른 듯한 대밭이 길게 늘어서 있다. 마을길로 접어들면 1960,1970년대로 시간여행을 하는듯한 착각에 빠진다. 개발되지 않은 시골집의 모습은 마치 소설 속의 ‘양접장’이 유교 전통을 지키려 애쓰며 살던 살림살이를 보는 듯하다. 빈집도 더러 보이고, 사람이 산다 해도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집집마다 개가 있어 행인을 보면 요란하게 지는다. 개 때문에 마을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고샅을 빠져나오면 거름 냄새와 함께 보리밭이 눈앞에 펼쳐진다. 참으로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다.
④ 토교마을 (소설 속 태고나루터)
그러한 오봉산 발치 열두 부락의 가난한 집 처녀 총각과 젊은 사내들은 이마에 히노마루(일본 국기)를 동여매인 채, 울고불고 하는 가족들의 손에서 떨어져, 태고나루에서 짐덩이처럼 떼를 지어 짐배에 실렸다. (물금까지 나가면 기차편도 있었지만 차는 위데에서 오는 그러한 사람들로 항상 만원이었다.) 손자녀를, 자식을, 남편을 ,딸을 그렇게 빼앗긴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아내들은 태고나루에서 눈물을 짓다 가깍운 미륵당을 찾아가기 일쑤였다.
가야부인과 박서방이 절을 세우려 하자, 앙심을 품고 방해하던 무당 천금새의 집 앞에 바로 ‘태고나루터’가 자리한다. 화제천과 낙동강이 만나는 곳에 토교마을이 있고, 원동취수사업소 앞이 ‘토교나루’인데, 소설에서는 태고나루터로 설정해 놓았다. 토교는 영남대로가 지나가는 곳으로 원래는 흙다리가 있었는데, 나중에 튼튼한 석교로 바꾸었다. 소설에서는 징용, 징병, 정신대로 끌려가던 화제리 사람들이 배를 타던 곳이다.
<히노마루>가 높다랗게 강바람을 맞아 펄럭이는 동사 앞뜰에는 옥이 말고도 여섯 명의 처녀가 나와 있었다. 배를 타야 할 태고나루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라, 오봉산 밑 열두 부락의 해당자들이 모두 거기에 모였던 것이다. 그들 도합 일곱 명을 위한 전송꾼과 구경꾼이 줄잡아도 사오십 명은 되어보였다. 그 열두 부락의 대표이기나 한 듯이 이와모도 구장이 시종 앞장을 서서 서둘렀다. 숫제 학교 선생님처럼, 고작 일곱 사람을 앞에 두고, 줄을 지어 서라느니, 면서기가 나누어 준 <히노마루>가 박힌 수건을 어서 이마에 동이라느니, 혼자서 야단을 빼듯했다. 그것을 지극히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던, 긴 칼을 허리에 찬 순사부장이 드디어 추발에 즈음한 인사말을 했다. “여러분은 오늘부터 우리 제국을 위해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여러분만의 명예가 아니라, 한편 이 지방의 자랑입니다.......!”
⑤ 용화사 (소설 속 미륵당)
강 건너 고암산이 이쪽 미륵당 아래의 강 구부렁이로, 그 웅장한 그림자를 쑥 내밀고 있었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물빛이 한결 시퍼런 강 구부렁이 쪽으로 사타구니가 벌어져간 꼴짜기의 오목한 부분에, 미륵당이란 강 구부렁이 쪽으로 사타구니가 벌어져간 꼴짜기의 오목한 부분에, 미륵당(굵게)이란 절이 납작하게 앉아 있다. 그래서, 모신 미륵불은 어지간히 크긴 해도 절 이름을 미륵암이라고 부르지 않고, 보살할머니들은 그저 미륵당이라고만 불렀다.
미륵당은 이 소설의 핵심 배경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가야부인은 시아버지 허 진사의 입젯날(제사 하루 전날), 제사상을 봐
황산 베리를 지나다가 바람이 너무 불어 잠시 피할 곳을 찾는다.
그러다 우연히 땅에 묻혀 있던 미륵불을
발견하게 되고 절을 지어 모시기로 한다. 미륵당이 서게 된 배경이다. 물금 용화사에 미륵불이 모셔지게 된 설화도 이와
흡사하다. 오래전 어느 농부가 낙동강에서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하는 물체를 발견하고 건졌더니 그것이 미륵불이었다.
한 스님이 건져다가 용화사에 모셨다는 것이 용화사의 설화이다. 용화사에는 낙동강에서 건져올렸다는
석조여래좌상(보물 491호)이 ‘거짓말처럼’ 모셔져 있다. 용화사 측은 모셔 올린 날(음력 2월 28일)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용왕대제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