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5 - 양산시립독립기념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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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만세운동
1919년 2월 하순, 한용운이 범어사에 내려와 오성월, 이담해, 오이산
을 만나 3.1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했다. 이에 오성월, 이담해 등은
깁법린, 김영규, 차상명, 김상헌, 김상기, 김한기, 김봉한을 범어사 대
표로 서울 3.1만세운동에 참가하게 했다. 이들은 3월 4일 독립선언
서 등 문건과 만세 시위에 참여한 경험을 가지고 범어사로 돌아왔다.
이 무렵 서울 3.1만세운동 소식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부산에도 시위
열기가 고조되었다. 범어사 승려와 학생들은 거사 일을 동래 장날
인 3월 18일로 잡고 동래장터 일대를 중심으로 만세 시위를 벌이기
로 결의했다. 그리고 3월 17일 밤에 열린 명정학교, 지방학림 졸업생
송별회 자리에서 김영규가 축사 도중 만세 시위를 독려하고 다른 주
동자들도 시위에 동참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시위 주동자들은 어
둠을 틈타 두 편으로 나누어 18일 새벽 동래 복천동에 있는 범어사
동래포교당으로 잠입했다. 하지만 명정학교 학생 오계운의 밀고로
일제 군경에 의해 김영규, 차상명, 김상기, 김한기 등이 연행되고 나
머지는 강제 해산되었다. 검거를 피한 이들은 학생들과 함께 동래읍 080
3.1운동유공비(범어사)
성 서문 부근에서 동래시장을 거쳐 남문까지 만세 시위를 벌였다. 19
일 오전에는 허영호가 주도해 한 차례 더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시
위 후 주동자 35명은 대부분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 부산지방법원,
대구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부산감옥소, 대구감옥소 등에서 옥
고를 치렀다. 일제는 이후 명정학교와 지방학림을 강제 폐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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