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3 - 양산시립독립기념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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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택언(吳澤彦, 1897 ~ 1970)
1897년 6월 17일 하북면 지산리에서 태어났다. 통도사 지방학림을 졸업하고 서울 중앙학림으로 유학하였다. 중앙학림에서 만해
한용운과 연결되어 활동하였는데, 이는 지방학림 당시 한용운이 1년간 강사로 재직한 것과 연관이 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바로 전날인 2월 28일 밤 한용운이 주재하던 불교잡지 ‘유심’의 사옥으로 사용하던 종로 계동 자택
에서 불교청년학생들이 소집되었다. 불교 중앙학림 (현 동국대학교) 의 학생 오택언을 비롯한 신상완, 백성욱, 김대용, 김법린, 김상헌
등과 중앙학교 (현 중앙고등학교) 의 학생이자 통도사 승려 출신 박민오 등이었다. 이들은 한용운으로부터 3,000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각 지역에 배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후 연고가 있는 지역의 사찰로 내려가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하였는데, 오택언은 양
산 통도사, 김법린과 김상헌은 동래 범어사, 김봉신은 합천 해인사, 김대용은 대구 동화사, 정병헌은 화엄사를 중심으로 전라도에
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하였다.
오택언은 3월 1일 탑골공원 만세시위에 참여하였으며, 당일 밤에는 청진동 일대의 주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이후 3
월 5일 통도사에 도착하여 서울 3.1운동의 경과를 들려주고 승려 김상문, 양만우 등과 양산에서의 만세운동을 논의하였다. 그러
나 서울 만세운동을 추적하던 일제 경찰에 3월 7일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후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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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택언 인물카드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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