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 - 양산시립독립기념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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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희·김교상 부자의 의병활동


         서병희의 고향인 좌삼에서 1km 떨어진 상삼마을에 살았다. 서병희가 하북

         면 성천리에서 일본인을 참살한 사건 후 울산수비대는 의병소탕작전에 나섰
         다. 그 전부터 양산 천성산 주변 내원사, 웅상 일원에는 서병희 의병부대가
         있던 곳이라 일본군경의 철저한 수색대상이었다.
         김병희가 살고 있는 상삼마을에는 일본 군경이 변장하여 숨어 있었다. 김병
         희와 김교상 부자는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포수 수십명을 상시 고용하고 있

         었는데, 이들은 잠복한 일본군이 화적떼라 생각하고 1908년 6월 26일 11시
         경 교전을 벌였다. 교전은 김교상이 김병희와 함께 자신의 집에 은닉해 둔 총
         기를 발포하면서 시작되었다. 잠시 후 김교상은 이들이 일본 수비대임을 알

         고 사격을 중지했으나, 일본군은 관병임을 알고도 고의로 발포한 것이라 하
         여 김병희 부자를 체포하고 무기를 압수한 후 심문하였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군은 김병희 부자를 보복 고문한 뒤 하북면 성천마을 앞 통도사 자비도
         량 근처의 소나무에 3일간 매단 뒤 처형시켰다. 시신은 삼감마을 우동신 노
         인과 통도사 주지 구하스님이 거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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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뉴스파크 2017.10.31.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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