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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체험

역사의 나루, 황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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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베랑길 이야기여행

황산역의 영화를 찾다 <2> 역사의 나루 황산진

서기 77년(탈해이사금 21년) 8월, 신라의 아찬(阿飡) 길문(吉門)이 거느린 신라군이 황산진구(黃山津口)에서 가야병과 싸워 1,000여 명을 죽이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길문은 그 공으로 파진찬(波珍飡)으로 승진하였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황산진구 전투’ 기록이다. 신라가 가야 병사를 무찌르고 대승을 거둔 내용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황산진구는 지금의 양산과 김해 사이의 낙동강 하류로서, 핵심지역은 양산 원동의 가야진(伽倻津) 또는 물금진(勿禁津)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따르면 낙동강은 과거 황산강이라 불리었으며 신라-가야의 전선은 낙동강(황산강) 하류 일대로 넓게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가야의 동쪽 국경인 황산강을 장악하여 가야지역 진출을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신라의 전력은 황산강을 봉쇄하여 상류와 하류를 잇는 가야 연맹체 각자의 수운 통행을 차단시키고 해상으로는 가야세력이 일본 열도와 교역하거나 진출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가 신라 중심으로 기록된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1,000여 명의 가야 병사가 전사했다는 내용은 가야에 있어서 심각한 소실이 아닐 수 없었다. 고대국가가 기틀을 잡아갈 무렵인 2~4세기 신라와 가야의 전쟁은 10년이 멀다하고 계속 이어졌다. 서기 87년(신라 파사이사금 8년)의 내용을 보자. 왕이 근심어린 얼굴로 명을 내린다.

‘짐이 부덕하여 나라를 가진 후, 서쪽으로는 백제와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가야와 접하여 덕으로 백성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위엄으로 다른 나라를 두렵게 하기에 부족하다. 마땅히 성새와 보루를 수리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라…’ 영에 따라 7월에 가소(加召), 마두(馬頭) 두 성을 쌓았다.

가소성과 마두성은 양산일대에 있던 성이다. 가야의 군세가 신라를 점점 더 크게 위협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불안한 나날 속에 98년(파사이사금 17년) 7월에는 폭풍이 불어 금성(경주)의 큰 나무들이 뽑혔다는 기사가 이어진다. 심상치 않은 징조였다. 그 틈을 노렸는지 가야는 두 달 뒤 신라의 남쪽 변경을 습격한다. 115년(지마왕 4년)에는 신라 왕이 친히 황산하를 건너 가야를 징벌한 사실과 116년에 재차 정벌에 나섰다는 내용도 나온다.

황산하, 즉 물금나루터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이다. 신라와 가야 간의 세력다툼을 이야기할뿐더러, 조선시대 육로(陸路)·수로(水路)의 변천사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를 품은 곳은 국내에 흔치 않다.

취수장으로 변한 물금나루

고대 우리나라 교통로는 백성들의 편의보다는 통치 및 군사적 기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만들어졌다. 육로는 주로 나라의 통신로로 쓰였고, 수로는 물자수송을 담당했다. 그러다가 5세기 경부터는 육로와 수로가 무역로 구실을 하게 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전국을 9개 주로 나누고, 경주를 중심으로 지방통치제도를 정비하였다. 교통로 역시 경주를 기점으로 방사형으로 뻗어 나갔고, 양산은 경주와 직접 연결되는 간선도로 5소경 중 낙동강을 건너 김해로 가는 김해선에 속했다.

낙동강 하류 요지에 자리한 양산은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담당했다. 원동의 가야진과 물금의 황산진(黃山津, 물금나루)은 교통과 물류의 거점이었다. 황산진은 신라 남쪽 변방의 낙동강 하류와 남해가 맞닿은 군사 요지로, 가야와 왜구를 방어하는 최전방이었다. 소지왕 9년(487년), 신라는 황산진에 우역(郵驛)을 설치했다. 우역은 공문서의 전달, 물품의 수송, 출장 가는 관리들의 숙박을 제공하던 통신·교통기관을 말한다. 이 무렵부터 황산진은 황산역(黃山驛)으로 대치된다. 황산역이 수로·육로의 통합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화물 수송은 육로보다 뱃길이 더 활발했다. 내륙 수로를 통해 민간의 화물수송과 사람의 왕래가 이루어지면서 낙동강 수운이 중시되었다. 낙동강 수운의 거점은 아래에서부터 감동진, 오늘날의 구포나루와 동원진, 호포진, 물금진, 삼랑진, 율지진, 사문진, 낙동진 등이 꼽혔다. 이들 나루터 주변에는 세곡을 모아두는 조창이 들어섰고, 선창시장 등 장터가 발달했다. 그러다 20세기 들어 철도가 놓이면서 수운시 쇠퇴했고, 해방 이후 자동차 도로의 확충으로 낙동강 수운은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신라-가야 때부터 역사를 이어온 황산진은 오늘날의 물금나루터 쯤으로 추정된다. 지형변화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여러 향통 사학자는 황산공원 내의 양산신도시취수장 부근일 것으로 보고 있다. 그곳에는 현재 간이 선착장이 조성되어 있고, 고깃배 몇 척이 물가를 지키고 있다. 양산신도시취수장 바로 위에는 부산시 식수를 갇는 물금취수장이 있다. 오랜 세월 개발과 변화를 거치면서도 물금나루터의 자취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월당나루의 추억
월당나루터

물금지역 낙동강변에는 세 곳의 나루터가 존재했다. 크게 보면 윗나루와 아랫나루가 있었다. 윗나루는 물금과 김해시 상동 매리를 연결했고, 아랫나루는 물금 증산리와 김해 대동면 월당마을(월촌리)과 이어졌다. 아래쪽에 위치한 이 나루터는 월당마을 쪽에서도 월당나루, 물금쪽에서도 월당나루라는 같은 이름으로 불렸으며, 양산 일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노선이었다. 나루터는 강의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여 흔히 쌍방향성이란 특징을 갖는다. 월당나루를 김해·양산에서 똑같이 월당나루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쌍방향 소통력 때문이다. 당시 뱃사공이 김해 월당마을에서 배를 운영하여 월당나루로 불렸다고 한다. 1970년대까지 나룻배가 다녔으나 1980년대 초에 없어졌다. 나룻배가 다닐 때 강의 이쪽저쪽 주민들은 서로 대소사를 챙길 정도로 정겹게 소통했다고 한다. 월당나루터는 조선시대 김해의 덕산역참에서 낙동강 건너 황산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말 조형물 , 가을 핑크뮬리

황산공원에 조성된 ‘낙동강 생태탐방선 선착장’에서 아래로 약 200m 내려가면 월당나루터가 나온다. 아랫나루라 불린 이곳은 신라와 김해 금관가야의 교통 및 국경 요충지로 알려졌다. 옛날 이곳에는 작원관원을 두어 육로와 뱃길을 감독·관리했다고 한다. 작원관원은 오늘날 세관원 비슷한 역할을 했다.

월당나루에는 1980년대 초까지 나룻배가 다녔는데 김해와 양산을 오가는 통학생들과 장꾼들이 주로 이용했다. 겨울철 강물이 얼면 곰배로 얼음을 깨 뱃길을 내고 다녔다 한다. 도선업 허가권은 물금~고암은 양산시가, 물금~매리는 김해시가 각각 가지고 있엇다. 하지만 월당나루터의 추억은 이제 주민들의 기억에서조차 희미한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이밖에도 물금나루, 용당나루, 감로나루, 신주나루, 개목나루 등이 양산과 김해를 연결했다.

곰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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