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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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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의 흔적-역사적사건

임진왜란
임진왜란(1592)
정의
  •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
역사적 배경
  • 조선은 사림 세력이 득세한 선조 즉위 이후 격화된 정쟁 등으로 중앙 정치의 모순이 나타났다. 군사적으로도 조선 초기에 설치된 국방 체 계가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서 100여 년간의 전국시대가 종결되어 통일 국가가 수립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봉건 영주들의 군사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대륙 침략을 모색하였다.
목적
  • 임진왜란의 목적은 무역 전쟁의 시각과 문화 전쟁의 시각에서 볼 수 있다. 일본은 포르투갈의 무역을 통해 16세기에 축적된 상업 자본을 바탕으로 성장한 다이묘 세력들이 동아시아 무역 특히 중국과의 직교역 체제를 확보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으로 볼 수 있다. 또 당시 낙후해 있던 문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 조선을 침략 대상으로 삼았다는 견해도 있다. 즉 조선의 앞선 성리학 이론과 활자 기술과 도자기 기술 등 과학 기술 문화를 획득하기 위해 전쟁을 기도하였다는 것이다.
3.1운동
3.1운동
정의
  • 1919년 3월과 4월에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순지리 신평마을과 양산읍 시장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
경과
  • 1919년 3월 13일 신평마을 장날 통도사 부속 지방학림 학생 김상문(金祥文)을 선두로 수 명의 학생과 통도사 승려들이 군중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로 인해 김진옥(金鎭玉)은 검거되어 징역 2년을 선고 받았고, 주동자 김상문은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탈출하 여 상해임시정부에합류하였다. 이어 5월 4일에는 400여 명의 주민이 재차 시위를 하였다. 두 번째 시위는 지도부의 지휘에 따라 일사 분란하게 행동하였다. 또 아주 격렬하여 일본 헌병들의 무기를 빼앗기도 하였으며, 이웃 언양까지 진출하였다.
결과
  • 시위 주동자들 11명은 대구감옥에서 8개월에서 2년의 형을 살게 된다. 양산 3·1운동에 참가한 다수의 지식인과 청년들은 출옥 이 후 1920년대 양산 지역 사회 운동과 민족운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3.27양산의거
3.27 양산의거(1919.03.27)
정의
  • 1919년 3월 27일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양산읍내에서 일 어난 만세시위 운동.
발단
  •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하였던 오택언(吳澤彦)이 한용운의 지시로 통도사에 내려와 통도사 강원(講院) 학생 대표들과 만나 만세시위를 할 것을 결의하여 1919년 3월 13일 신평의거가 발생하였다. 이어서 양산읍내에 1919년 3월 11일 부산에서 발생한 초량일신여학교 시위, 3월 13일 동래에서 발생한 동래고보생 3·1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3월 27일 시위가 발생하였다.
경과
  • 양산의 3·1운동은 읍내에서 3월 27일 시위가 일어나기 이전에 하북면 신평읍에서 3월 13일에 먼저 발생하였다. 한용운의 지시로 통도사에 내려온 오택언을 통해 서울 상황이 신평읍에 전해지고, 이에 통도사 승려들이 신평장날인 3월 13일 통도사 부속 지방학림 학생인 김상문(金祥文)을 선두로 학생과 승려들이 신평리(新坪里) 장터에서 군중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였다. 신평시위에 참가한 김진옥(金鎭玉)은 검거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시위 주동자 김상문은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탈출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참가하였다. 그 뒤 김상문은 1919년 8월 25일 경의선의 독고감(獨孤堪), 경원선의 명제세(明濟世)와 함께 경부선 연락 책임 특파원으로 국내에 잠입해 들어왔다. 이외 신평에서는 5월 4일 400여 명의 주민이 재차 시위를 한 것으로 파악된다.
결과
  • 시위 주동자들 11명은 대구감옥에서 8개월에서 2년의 형을 살게 된다. 양산 3·1운동에 참가한 다수의 지식인과 청년들은 출옥 이 후 1920년대 양산 지역 사회 운동과 민족운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양산경찰서 습격사건 발생
양산경찰서 습격사건 발생(1932.03.16)
정의
  • 1932년 3월 16일 일본 경찰의 양산농민조합 탄압에 맞서 조합원 및 가족들이 양산경찰서를 습격한 사건.
경과
  • 농민들의 경찰서 진입과 유리창 파괴에 위협을 느낀 양산경찰서장은 농민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공포탄을 발포하였다. 이에 농민들은 일시 흩어졌다가 양산협동조합 사무실에 재집결하여 유치장을 습격하려 하자, 양산경찰서는 부산과 동래경찰서의 지원을 받아 시위 관계자를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다.
결과
  • 조합원 신영업을 비롯한 16명이 체포되어 부산형무소로 호송되고 시위 군중을 해산하기 위해 양산경찰서장이 쏜 총알에 양산농민조합 간부 두 명이 숨졌다. 또한 양산농민조합의 일부 간부들이 조선공산당재건운동 세력과 연계되어 있었던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10월 항쟁(1946.10.08)
정의
  • 1946년 10월 8일 미군정의 정책에 맞서기 위해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항쟁.
발단
  • 양산의 10월항쟁은 1946년 10월 8일 오후 1시 15분 양산시장에서 600여 명의 시위 군중들이 참여하 면서 시작되었다. 시위군중은 깃발을 앞세우고 ‘식량공출 반대’,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친일파 배격·처단’, ‘토지의 무상몰수·무상분배’, ‘소작료 3·7제’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양산경찰서로 이동하였다. 시위를 진압하고자 경찰이 곧 출동하였으나 시위 군중들이 경찰을 구타하 고 총을 탈취하면서 경찰서를 공격하였다. 그 뒤 미군과 경찰이 출동하자 시위 군중들은 산으로 피신하여 경찰과 대치하였다.
경과
  • 양산의 10월항쟁의 특징은 다른 지역과 같이 면 단위가 아닌 군 단위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10월 항쟁에 관여한 다수자는 언양 부근의 험준한 신불산에 입산하여 인민혁명군 제3지구사령부라는 명칭 아래 유격전을 하였다. 경찰과 부산지구경비대가 합동작전으로 수차에 걸쳐서 토벌을 하였지 만 그때마다 유격대는 사전에 도주하여 경찰들은 진압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과
  • 10월항쟁에 참여한 다수자들이 유격대를 형성하자 경찰은 1946년 12월 부산에서 파견된 서북청년회 별동대원 200여 명과 함께 토벌대를 편성하여 신불산 일대 유격대 거점을 공략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보도연맹사건
보도연맹사건

우리나라 근현대사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도 큰 사건인 6·25 전쟁. 이 시기와 관련된 이야기는 전국 어디를 가도 남아있고, 또한 양산읍성도 6·25 전쟁에 대한 아픈 흔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세월이 흘러 이러한 흔적들도 점점 흩어져가고 있지만, 아픈 기억은 사람들의 뇌리에 좋은 기억만 큼이나 오래 남아 있다. 특히 국민보도연맹사건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라 하 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국민보도연맹사건이란 해방 직후 6·25 전쟁 때 북한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내려와서 낙동강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이 때 북한군이 남쪽으로 빠르게 내려온 이유가 바로 우리나라 내부에 북한군을 돕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전쟁 직후, 이승만 대통령은 군인과 경찰을 동원하여 전쟁 후의 안전을 지킨다는 목적으로 국민보도연맹의 관계자를 살해하였 는데, 양산읍내에서도 옛 양산군청 앞 목화창고 3곳에 이들을 집어넣어 인적이 드문 새벽에 이들을 동면 사배고개, 호포 야산, 교리 춘추원 뒷산 등지에서 학살하였다.

정확한 인원수는 알 수 없지만, 창고에 갇혔던 인원을 생각한다면 수백 명 이상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국군 23연대는 양산토벌작전을 전개하여 물금, 상북, 하북 일대의 공산당원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였다. 토벌대는 토벌한 빨치산들을 잡아 현재 양산문화원 앞쪽의 목화창고 쪽에 전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공산당원이었다기보다는, 배가 고팠던 그 시절에 국민보도연맹을 가입하는 것은 곧 식량을 얻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또한 몇몇 사람들은 직업을 보장해준다는 경찰의 거짓 연설을 믿고 빚까지 얻어가면서 보도연맹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당시 지역 주민들은 이념의 짙은 색채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단지 자기네 가족들을 먹여살리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던 것이다. 그만큼 좌익운동과 관계없는 다수의 지역 주민들이 국민보도연 맹에 등록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양산읍성 내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아픈 기억은 양산 사람들의 머릿속에 지울 수 없는 흉터 처럼 남아있고, 그러한 기억이 언제 구전에서 사라질 것인지 안타까울 뿐이다.

도롱뇽 소송 사건(2003.10.15~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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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 소송사건에 대해 안내한 표입니다.
연도항목명유형
2003.10.15 도롱뇽 소송사건 발생 사건
2006.06 도롱뇽 소송사건 종결 사건
정의
  • 2003년 ‘도롱뇽의 친구들’이라는 환경 단체가 경상남도 양산시 천성산에 사는 도롱뇽을 원고로 내세워 경부고속철도 공사 중지 가처분 소송을 낸 사건.
역사적 배경
  • 경상남도 양산시는 지리학적으로 자연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으며, 특히 늪지대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담고 있다. 특히 통도사와 내원사 주변의 희귀한 꽃과 식물·동물이 잘 보존되어 있고, 화엄 늪과 밀밭 늪은 생태적 가치가 매우 높다. 그런데 1990년대 정부가 경부고속철도 건설 노선을 발표 하고 결정하면서 대구~부산 구간에서 천성산을 관통하는 13.3㎞의 터널(원효터널)을 뚫기로 결정하 였다. 2002년 경부고속철도 건설 제2단계인 대구~부산 공사 단계가 시작되면서 환경 단체 및 지역 주민 들의 반대가 심해지자 노무현 대통령은 공사를 중단하고 대안 노선을 검토하게 했으나, 2003년 9월 기존 노선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목적
  • 경상남도 양산시 천성산에 산재한 22개의 늪과 12개의 계곡에 가장 많은 개체수를 가지고 있는 종이 도롱뇽이다. 특히 멸종 위기 종으로 보호되고 있는 1급수 환경지표종인 꼬리치레도롱뇽의 대규모 서식지여서, 이곳이 생태적 가치가 높은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터널을 뚫으면 산 위의 습지 가 마르게 되어 도룡뇽이 살 곳을 잃게 되며, 이는 곧 생태계의 파괴로 이어지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발단
  • 2003년 10월 천성산 터널 공사 재개가 확정되자 환경 단체 관련자 및 천성산 사찰의 승려들이 중심 이 되고 지역 주민들이 동참하여 환경 단체인 ‘도롱뇽의 친구들’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한국고속 철도건설공단을 상대로 ‘천성산 구간(원효터널) 착공 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고속철도 천성산 관통 저지 전국비상대책위원회(공동 대표: 동진 조계암 주지, 지율 내원사 승려, 황도국 원불교 교무,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박병상 풀꽃세상을위한모임 대표, 이인식 마창 환경운동연합 의장, 최종석 부산녹색연합 운영위원장, 김제남 녹색연합 사무처장)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도롱뇽의 생활 근거지인 천성산 일대를 관통해 건설될 예정인 경부고속철도 터널 공사의 사업 계획 승인은 환경 영향 평가나 생태계 특별 보호 구역 내 제한 행위에 대한 협의 절차상 문제 가 있으므로, 터널 공사의 사업 계획 승인과 공사는 위법하고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경과
  • 소송을 제기한 승려는 지율 등 3명이다. 천성산을 보호하기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는 부산시청 광장 에서 경부고속철도 관통 반대 운동을 위해 ‘도롱뇽의 세상’이라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그 뒤에 비상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반대 시위 및 서명 운동이 있었고, 승려들이 중심이 된 삼보일배, 지율의 5차례에 걸친 100일 단식이 있었다. 이로 인해 공사 기간 중 2003년 3월과 2004년 8월, 그리 고 2005년 8월에 각각 몇 개월에 걸쳐 공사가 중단되었다.
결과
  • 대법원은 2006년 6월 2일 ‘도롱뇽의 친구들’이 낸 소송에서 고속철도 터널 공사가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되어, 공사 중단 이유가 없다고 판결했다. 또한 대법원은 소송 대상 자인 ‘도롱뇽’의 지위를, 사건을 수행할 당사자 능력이 없는 자연물로 규정해 소송 대상자로 인정 하지 않았다.이에 따라 2년 8개월 동안 ‘환경’과 ‘개발’이라는 이슈 제기는 결국 개발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승려 지율 등은 대법원에 대하여 강한 불만을 가지면서, 현재 부산교육대학교 근처에서 ‘열 린 공간-초록’이란 카페를 개설하여 또 다른 반대 운동을 시작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 도롱뇽 소송 사건은 천성산에 서식하고 있는 생물의 생명에 대한 존중과 자연 환경 훼손의 심각성을 일깨워주었다. 또 사전에 정확한 조사 없이 구간을 선정해 결국 터널 공사를 중단시킴으로써 국민들 의 세금을 낭비하는 정부의 개발 논리에 또 한 번의 경각심을 주었다. 정부는 국민들에게 편리한 생 활을 제공한다는 측면만을 생각하여 고속철도 공사를 감행하기 전에 주변 환경에 대한 올바른 판단 과 체계적인 공사 시행이 이루어져야 함을 경고하는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양산 사랑운동 발생(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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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 소송사건에 대해 안내한 표입니다.
연도항목명유형
2004 양산사랑운동 발생 사건
정의
  • 2004년부터 양산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양산을 고향처럼 사랑하자는 범시민 운동.
개설
  • 양산사랑운동은 2004년 신희범 양산시장권한대행이 신년사에서 처음 밝혔다. 이후 양산사랑운동을 구체화하기 위한 추진 계획안을 마련했고, 그해 2월에 시정조정위원회에서 실천 과제 및 추진 일정 등을 심의·확정했다.
역사적 배경
  • 경상남도 양산 지역은 예로부터 삽량주라고 일컬어졌고,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국난 극복에 앞장서서 어느 고장보다 자긍심이 높은 고장이다. 또한 신도시로서 시민들의 열정이 넘 쳐나며 역동적인 문화가 내재되어 있는 고장이다.
목적
  • 양산사랑운동은 시민의 향토애 및 공동체 의식 함양을 통해 지역 발전의 원동력을 키우고, 새로운 ‘사랑과 포용의 시대’를 테마로 하여 세계 속의 양산시로 우뚝 서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양산 사랑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발단
  • 신도시로서 성장한 양산시는 인구 60만 명의 중·소도시지만, 양산시민들이 양산시를 사랑하지 않 는다면 양산시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이런 차원에서 양산시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갈등 에서 화합으로, 좌절에서 희망으로 나가야 한다.
경과
  • 양산시는 양산사랑운동의 효율적인 추진을 위해 추진 과제별로 관내 각종 직능 단체 및 행정 기관 등을 추진 주체로 정하고, 시청 전 부서를 지원 부서로 참여하도록 했다. 특히 행정적인 지원과 시민 사회 단체의 적극적인 참여를 위해 양산사랑운동본부를 발족하였다. 2004년 6월에는 각종 사회· 직능·종교 단체와 대학, 언론 기관·행정 기관 등이 참여하는 범시민협의체로 양산사랑운동본부를 발족하고 선포식을 개최하였다.
결과
  • 우리 양산 바로 알고 널리 알리기
  • 푸른 숲의 도시 양산 가꾸기
  • 기본이 바로 선 양산 만들기 등 네 가지로 정하고, 각 테마별로 네 가지 실천 과제가 마련되어 있다. 이를 양산사랑운동에서의 ‘사’와 네 가지 테마에서 ‘넷’, 네 가지 실천 과제에서의 ‘넷’을 엮어 ‘4·4·4운동’으로 전개하며, 테마별 실천 과제는 다음과 같다.
    • 우리 양산 바로 알고 널리 알리기: 우리 양산의 역사와 문화 사랑, 전 국민에게 친숙한 양산 만들 기, 양산 아카데미(시민 교양 강좌) 활성화, 우리 양산 지키기 운동 등이다.
    • 지역 경제 지키기: 우리 지역 생산품 구매 및 소비 확대, 해외시장 개척 및 국제 박람회 참가 지원, 생산성 있는 실업 대책, 다시 찾고 싶은 양산 만들기 등이다.
    • 푸른 숲의 도시 양산 가꾸기: 숲의 도시 양산 가꾸기, 꽃길 및 꽃밭 조성, 우리 하천 가꾸기, 쓰레기 줄이기 운동 등이다.
    • 기본이 바로 선 양산 만들기: 기초 질서 지키기, 이웃·동료 간 정 나누기, 이웃·동료 간 칭찬 하기, 안전한 양산 만들기 등이다.
의의와 평가
  • 양산사랑운동은 양산시민 모두가 양산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양산을 소중히 아끼고 베푸는 지역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살 맛 나는 내 고장으로 가꾸고자 하는 지역 사랑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양산사랑 운동은 신도시로서 지속적인 성장·발전을 위해서, 또는 시민들이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에 애향심과 자긍심을 갖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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